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병철의 양아들 (문단 편집) == 역사 == [[강병철]] 감독의 커리어가 긴 만큼 양아들 소리를 들을법한 선수가 2007년의 [[롯데 자이언츠]]에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. 1980~90년대 강병철이 지휘하던 시절 롯데의 젊은 선수들은 물론이고, [[한화 이글스]]나 [[SK 와이번스]] 감독직을 역임하던 시절에도 유별나게 중용하던 선수들은 있었다. 특히 1996 시즌에는 [[송지만]], [[이영우]], [[임수민(야구선수)|임수민]] 등 신인들이 대거 파격적인 출전 기회를 얻었을 정도. 그해에는 한화의 성적도 좋아서 성공적인 리빌딩의 선례로 평가받고 있다. 아래 명단에 있는 선수들이 대표적. 롯데에서 중용한 영건들은 두 차례 우승의 밑거름이 되었고, 한화와 SK에서 중용한 선수들 역시나 적잖은 선수들이 장기적으로 좋은 활약을 보여줬다. 하지만 이 단어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시기는 2006~2007년 롯데 감독직을 역임하던 시절. 당시 강병철 감독은 [[강영식]], [[김주찬]], [[이인구(야구선수)|이인구]], [[이원석(1986)|이원석]], [[강민호]], [[이우민|이승화]] 등 젊은 선수들에게 꾸준히 1군 기회를 부여했는데, 대부분이 매번 찬스에선 찬물을, 수비에선 실책을, 위기 때는 [[방화범(야구)|방화를 저지르는]] 등, 롯데 팬들의 [[환장|복장을 뒤엎어버리는]] 선수들로 강병철 감독은 엄청난 비난을 들으면서도 이들에게 지속적으로 기회를 부여했다. 그러했던 탓에 '강영식(?)', '강주찬', '강인구'등 강병철의 양아들이라는 식의 호칭이 붙었다. [[강민호]]는 아예 성씨도 같다 보니 강병철의 '''친아들''', 내지는 '''친척'''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. 강병철 감독이 이 선수들을 중용한 이유는 그리 특별하지 않다. 다른 선수들에 비해 의욕적이고 성실했으며, 무엇보다도 '''확실한 잠재력을 갖춘 선수들'''이었기 때문이었다. 사실 강 감독은 이들 외에도 [[서정호]], [[김문호]], [[손용석]] 등 롯데의 젊은 야수들은 전부다 몇번씩 기회를 부여하며 테스트를 했지만, 본인의 자질이나 성실성에 문제를 보인 이들은 떨어져 나가고 중용된게 위에 나온 양아들들이었다. 가히 --감독하는 [[허구연]]-- 야구계의 [[아르센 벵거]]라고 할수 있을 정도로 어린 선수들을 좋아했다. 그러나 프로는 실력, 더 정확히 말하면 결과로 말하는 법이다. 물론 [[양준혁]], [[이종범]], [[염종석]], [[김재현(1975)|김재현]], [[박재홍(야구)|박재홍]], [[류현진]], [[이정후]], [[강백호(야구선수)|강백호]]처럼 데뷔와 함께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선수도 있지만, 이는 어디까지나 극소수의 예외적인 사례일 뿐 대개의 경우 젊은 선수 하나 키우는 데는 몇 년의 세월이 걸린다. 그리고 당시 한창 [[8888577|비밀번호]]를 찍고 있던 롯데는 이러한 유망주들이 성장할 여유를 더 주기 어려웠고, 팬들과 프런트 모두 2007년을 끝으로 강병철 감독과의 이별을 선택했다. 이때까지만 해도 강병철 감독에 대한 평가는 "지나치게 유망주만 선호해서 성적을 망친 감독"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나, 2008년에 [[제리 로이스터]] 감독이 부임한 뒤 '''평가가 180도 뒤집혔다.''' 강병철이 기회를 계속 부여했던 '유망주'들의 이후 결과를 하나씩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. - [[강민호]]: 장타력이 뛰어난 공격형 포수로 성장하며 [[베이징 올림픽/야구|베이징 올림픽]]을 시작으로 [[이만수]]-[[박경완]]을 잇는 역대급 포수로 발돋움했고, 2022년에 KBO 통산 300홈런을 돌파하며 만 37세인 2023년에도 팀 타선을 멱살잡고 이끄는 레전드가 되었다. 클래식 스탯으로는 잘 알아보기 힘들지만, wRC+로 봤을 때 강민호는 2005년에 54에 불과했으나 강병철 감독이 부임하고 2006년에는 89, 2007년에는 105를 넘기며 이미 리그 평균 이상의 생산성을 가지는 타자로 변모했다. 각성한 2008년에는 무려 wRC+ 135를 찍고 19홈런을 때리며 당당히 롯데의 중심타선이 되었고, 커리어하이인 2015년에는 무려 wRC+ 165를 찍고 포수로 35홈런을 때려내며 OPS가 10할을 넘기는 등, 10년전의 강민호였다면 상상할 수도 없는 대기록을 써내려갔다. - [[강영식]]: 투수조련사 [[선동열]]조차 포기했다는 오명을 씻으면서 상시에 랜디영식 모드가 되었으며, 각성한 2008년부터는 롯데가 사상 처음 가져보는 필승계투진의 주축 멤버가 되었다. - [[김주찬]]: 2007년에는 wRC+ 70 중반대에 불과한 그냥 발만 빠른 교타자에 불과했으나, 2008 시즌 초반의 롯데 돌풍에 있어서 부상으로 한달간 빠지기 전까지 큰 역할을 했다가 후반기에 다시 큰 활약을 하면서 돌풍의 주역이 되었으며, 처음으로 규정타석 3할을 찍고 wRC+ 108을 기록하는 등 공격력에 있어 큰 발전을 보여주었다. 2011년과 2012년에는 115가까이를 찍으며 더욱 발전된 타격을 보여주었고, 이후 기아 타이거즈로 이적한 후에는 120~135 정도를 찍을 정도로 준수한 공격력을 보여주는 선수로 더 스텝업했으며, 2020년까지 통산 타율 3할이라는 기록을 남기고 아름답게 은퇴했다. - [[이인구]]: 기자들이 경직된 롯데 1군과 2군의 유동성을 말할때 반드시 언급될 정도로 2군에서 상당한 성적을 보여주다가, 2008년 [[정수근]]의 이탈로 삐걱거릴 뻔 한 롯데를 위기에서 구해내며 준플레이오프 까지 뛰어난 [[테이블 세터]] 로서 크게 활약했다. 다음 해인 2009년에는 훨씬 많은 95경기에 출장하며 작년보다 타격성적은 떨어졌지만 그래도 1군에서 쏠쏠한 활약을 보여주었다. -[[이원석(1986)]]: [[로이스터]] 감독의 [[이대호]] 3루수 고정으로 출전 기회가 없었으나, 2009년 [[두산 베어스]]로 가서 잠재력을 터뜨렸고, 보상선수 최초의 FA라는 기록을 남기며 삼성으로 이적하더니 장타력까지 터지며 늦은 전성기를 누렸다.--[[이우민]]만 완전히 망했다-- 결과적으로, 강병철 감독의 [[양아들]]들, 특히 2006~2007년에 자주 애용했던 선수들은 2008시즌 후반의 [[로이스터 매직]], 나아가 201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5년 연속 PS 진출의 주축이 되었다. 그리고 임팩트가 짧게 끝난 선수도 있었지만, 상당한 선수들이 잠재력을 터뜨리면서 일부는 롱런, 일부는 팀 레전드, 일부는 KBO 레전드급 성적을 남기기도 했다. 강병철 감독의 눈은 정확했다. 자신이 감독일 때 활약을 못해줬을뿐이지. 2017 시즌 종료 후 [[강영식]]과 [[이우민]]이 은퇴하고 [[강민호]]는 삼성으로 떠나면서 '''강병철의 양아들들은 모두 롯데를 떠났으며,''' 2023시즌 기준 남아있는 현역 선수는 [[강민호]]와 [[이원석(1986)|이원석]] 두 명 뿐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